조선朝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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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앉아서 먹는 상을 사용하였으나, 제례상만은 입식 상을 썼다.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 때 이미 지배층의 전통이 된 뒤 조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민들은 이와 아울러 민요와 탈춤 등을 통해서 독자적인 정서를 응집하여 표출하고 있었다. 중세 신분질서의 모순 등을 담아 공동 제의에 이어 축제로서 공연되던 탈춤은 차츰 여러 지역에서 상업문화로 변모하였고, 나아가 판소리나 한글소설에도 서민적 정서가 담겨지게 되었다. 장시의 발달로 전보다 정보의 확산이 쉬워진 환경 속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15세기 중엽부터는 보(洑)가 개발되어 관개에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논농사가 한층 활발해졌으나, 자연재해 특히 가뭄이 들 때 그 피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 후 이모작을 위한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보의 수리와 신축이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의 사법 행위에서 반드시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은 지배층의 범죄와 관련된 것과 사형으로 판결이 난 것들이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적인 민족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이때는 민간인의 기업 진출이 활발해졌다. 대동법은 전결을 기준으로 공납을 징수하였으므로 농민들의 부담이 그 이전보다 가벼워졌다. 실제로 선혜청이라는 명칭은 농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에게 상업자본을 형성하게 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는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외치는 상황이 참담하고 걱정이 된다고 말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황손 이석 씨는 현재 조선왕조 발상지인 전주에서 우리 문화를 설명하고 알리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강현식이 쓴 책,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에 나타난 갖가지 심리적 문제를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지은이가 조선왕조에서 벌어진 일련의 비극들을 분석한 시각이 무척 흥미롭다.


역사군담소설은 영웅소설과 달리 실제의 역사적 전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유형이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 임진록」과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 박씨전」, 「 임경업전」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들이 비록 그 제재와 인물을 역사적 사실에서 취해 오고 있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사실 그대로이기보다는 두 차례의 전란 이후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설화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허구적인 것이 압도적이다. 이 소설들은 전란의 피해와 아픔을 민중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양반의 음악은 시조(時調)와 가사(歌辭)로 발전하였는데, 소리가 길게 이어지면서 유장(悠長)한 멋을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난전 중에는 보잘것없는 상인이 많았지만, 더러는 시전 상인과 맞설만한 부상도 있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수공업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 수공업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장의 일부는 아직도 관아에 예속된 임금기술자로 남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 대다수는 자유수공업자가 되어 상업자본가에게 임금기술자로 고용되거나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의존성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며, 다른 사람의 충고 없이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성종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윤씨는 하루하루가 괴롭고 힘들었고 결국엔 투서 사건을 꾸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년 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망상이나 환청을 경험할 정도로 현실 판단력이 심하게 훼손되기도 한다.


지방의 각 영(營)과 진(鎭), 계수관 등의 무기 제조에 필요한 철은 철이 나는 고을에 철장(鐵場)을 두어 채취하였다. 철장은 전국에 20여 곳이 있었고, 각기 200인의 취련군(吹鍊軍)을 동원하여 매일 할당량을 생산하였다. 어민은 대부분 어업을 전업으로 하지 않고 농사를 병행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을 어염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아 어한(漁漢), 염한(鹽漢)이라 부르며 양인이지만 천업에 종사하는 신량역천주115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실록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이어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1431년에 『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태종실록』 편찬 직후 정부에서 보관의 필요성을 느껴 위의 삼조 실록(三朝實錄)을 고려시대의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사초는 그 극비성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민화는 대부분 서민 가운데서도 경제력을 축적한 축이 향유하였던 내용에 국한된다. 개항 이후 주자성리학의 시대가 마감된 뒤 사회를 주도하게 될 자본가 계층이 어떠한 문화와 정서를 갖게 될지를 이미 이 시기의 민화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31년 경성제대 요코야마(橫山將三郞) 교수가 발굴한 영도 동삼동 패총(貝塚)에서 갖가지 어로도구와 함께 도미나 상어 뼈도 함께 발견되어 석기시대부터 우리 선인들이 고기잡이에 종사하였음이 분명하다. 미루어 짐작컨대 무슨 알지 못할 연유로 어민들의 어로 행위가 극히 제한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 상황을 유추할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상고해 보기로 한다. 조선왕조 4대 임금인 세종(世宗) 19년(1416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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